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교착상태 ====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 십자군 원정을 온 병력들 + 기존에 예루살렘 지역 일대에 위치한 기독교 병력들.]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 왕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 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 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프레오가 그를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인 "말리크"라고 칭하는 모습을 본 아랍 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다.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 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 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 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 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 후에 이 일을 들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보두앵 2세는 이들을 불러서 혼내고 이후는 적어도 십자군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다. 1108년 10월의 일로 [[알레포]] 영주 라드완, [[안티오크]]의 탄크레디와 [[모술]] 영주 자왈리, [[에데사]]의 조슬랭 간의 전투였다. 전투 자체는 라드완과 탄크레디 연합이 승리했지만, 가뜩이나 1차 십자군 대다수가 유럽에 귀환해서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보두앵 2세는 십자군끼리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어쨌든 보두앵 2세의 중재로 탄크레디와 조슬랭은 화해했다. 이렇듯 이 시절 이슬람 세력은 일치단결해 십자군과 맞서는 건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영토 싸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당했다. 만약 전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키아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에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박살이 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 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3차 십자군 당시는 1-2차 십자군 때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뭐, 엄밀히 말하면 살라딘도 누르 앗 딘이 어느 정도 통합해놓은 걸 물려받은 점도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고 [[아이유브 왕조]]가 끝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살라딘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100년 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뒤에 어찌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온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 때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딘이 후방을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의 혼담도 이때 나온 일이었다. 허나 살라딘 역시 호락호락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1191년 11월 마침 살라딘은 당시 영주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휘하 병력을 해산한 상태였다.[* 이슬람도 봉건 시대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영주들이 병력을 끌고 와 참전하는 식이었는데 살라딘이 오랜 기간 소집하자 병력의 유지비를 부담했던 영주들은 해산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예루살렘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두고 군대를 되돌린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위력 시위였던 듯하다. 한편,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한 다음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 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딘의 그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